그렇게 문장은 삶이 됩니다. 읽힌 문장은 사람을 바꾸고, 바뀐 사람에게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고, 그래서 어떤 문장은 이전과 다르게 읽히고, 그것이 또 그의 사건을 바꾸어 가겠죠. 문장과 삶이 겹쳐지는 중첩,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은 조금 쓸쓸하지만, 감히 말하건대, 꽤나 달콤하기도 합니다. 혼자만 알 것 같았던 비애, 혼자만 느꼈을 것 같은 두려움을 누군가도 함께 나누어 준다면, 그리고 그 누군가가 폴 오스터와 같은 작가라면, 그것을 어찌 씁쓸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. 여러분 앞에, 그래서 폴 오스터의 문장들을 내놓습니다. 그 달콤하고도 쌉싸름한 맛을 나누어 드릴게요. 몇몇 문장은 스쳐 지나가시겠지요. 읽지도 않은 것처럼 넘겨 버리실지도 모릅니다. 하지만 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, 몇몇 문장은 또 스스로 영원해지겠지요. 바래지 않는 빛을 품고 마음 한켠에서 빛나겠지요. 부디 그런 문장들을 많이 만나시길 바랍니다.
나에게는 그 우연의 일치가 의미심장하기 그지없어 보였지만 정확히 어째서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.
마치 내 운명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내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할 때마다 알아 듣지 못할 말로 바뀌는 것 같았다.
색채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 사람을 <경험해 보기> 전까지는 어떤 사람에 대해 무엇도 알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.
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. 예를 들자면, 너는 누구인가? 그리고 만일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
어째서 계속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?
그에 대한 대답을 나는 알지 못한다.
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다.
내 말에 귀를 기울이자.
내 이름은 폴 오스터다.
그것은 내 진짜 이름이 아니다.
우리는 때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알기도 하겠지만, 결국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.
누구도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.
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바로 그 간단한 이유로.
뉴욕은 무진장한 공간, 끝없이 걸을 수 있는 미궁이었다.
아무리 멀리까지 걸어도, 근처에 있는 구역과 거리들을 아무리 잘 알게 되어도,
그 도시는 언제나 그에게 길을 잃고 있다는 느낌을 안겨 주었다.
끔찍할 정도의 지루함, 단조롭고 조용하기만 했던 길고도 외로운 시간들,
세상이 돌기를 멈추어 버린 오전과 오후들.
하지만 알고보면 그 황량한 바탕은 당신이 안에서 뛰놀던 정원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.
당신은 바로 거기서 스스로 혼자 있는 법을 배웠다.